그 모든 크레의 시작
파충류란 내게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동물농장에서 가끔 보는 어떤 것이었다. 키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함께 살게 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도,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혼자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내 삶에 조용하게 걸어들어온 남자친구가 ‘루피타’ 라는 도마뱀을 소개해 줬다. 처음엔 만지지도 못하고 구경만 했다. 가끔 뽀시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를 제외하곤 죽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조용한 친구였다. 루피타는 밥도 코딱지만큼 (혹은 그보다 덜)먹고 낮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으며 아-주 가끔 미세하게 [뺙뺙뺙뺙] 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종 들여다봤다.
그때부터였나? 촉촉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용기를 내어 루피타를 손바닥 위에 올려보았던 날. 사육장 유리를 사이에 두고 눈싸움만 하던 우리는 그 뒤로 급속히 친해졌다. 루피타를 향한 관심이 아주 커져버렸다. 계속 들어도 잊어버리던 크레스티드 게코라는 길고 낯선 이름(?)종류(?)도 외웠다. 유튜브를 뒤졌다. MBD를 앓고 있는 도마뱀을 위한 정보를 찾기 위해. 그리고 크레스티드 게코 도마뱀의 올바른 사육 방법을 배우기 위해. 내 도마뱀에게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주기 위해!
그러다가 두몽이네 마뱀이들이라는 위험한 도마뱀 채널을 발견하고 마는데… 그 채널은 정말로 위험했다. 자몽이라는 순한 뚱마뱀은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고 나의 넘치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다! 크레 집사들에게 생긴다는 입양병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마침 집에서 머지 않은 곳에 파충류 샵이 있었고, 산책이나 할 겸 걸어서 그곳에 갔고, 다양한 크레들이 있었고, 귀여웠고… 몇 시간 동안 서서 크레를 구경하다가 발이 안 떨어져서 한 마리를 데리고 왔고, 그날은 구름이 예뻤고 그래서 둘째는 구름이가 됐다. 주황색 구름이.(주황+구름=주름이로 하려다가 참음.)
구름이는 푸다다닥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녔고 밥(슈푸)도 도리도리하면서 안 먹고 오직 귀뚜라미만을 원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의 안구에서는 묘하게 빛이 났다. 맞다. 그는 미친마뱀이었다. 슈푸를 주는 날엔 구름이뿐만 아니라 우리도 온 몸에 슈푸샤워를 해야 했다. 그래도 묘하게 멍청이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랬다. 구름이로도 부족했던 것이다.
명절 연휴였다. 명절은 파충류 샵들의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도 크레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파충류 샵을 찾았다. 차를 타고 가서 아이들을 구경했고 하나같이 다들 귀엽고 구름이보다 더 작은 크기의 크레들을 보는 순간 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나는 금사빠였다. 역시 또 그냥 나올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엔 아들만 둘이었다. 언젠가 우리 애들의 애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딸아이가 필요하기도 했다. 나는 로꿈이를 보는 순간 “우리 집에 갈래?”를 시전했고 어느새 로꿈이는 내 손에 있었다. 로꿈이는 등록금으로 쓸 돈을 깨서 데려왔기 때문에 록금→로끔→로꿈이가 되었다. 그렇게 구름이와는 달리 아주 얌전하고 천천히 걷는 예쁜 막내가 생겼다. 아주 예쁘게 생겨서 여자아이가 될 줄 알았던 로꿈이는 그로부터 5일 뒤 아들로 판명되고 말았다.
22년 11월에는 킨텍스에서 큰 파충류 박람회가 열렸다. ‘그래, 도마뱀을 키운다면 응당 파충류 박람회 한 번쯤은 가봐야지. 거기 가면 사은품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도마뱀 용품 할인도 많이 할 거야.’ 라는 합리화를 하며 분당에서 일산까지 달려갔다. 갈 때까지만 해도 입양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딸이 아직 없잖아? 아주아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딸을 찾아 헤맸다. 한참을 헤맨 끝에 만난 우리 딸은 예쁜 노란색이었다. 박람회는 좋은 것이었다. 찾고 있던 딱 알맞은 사육장도 찾고 슈푸 샘플도 받고 백업과 코르크도 샀다.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를 먹었는데 차 안에서 딸이 녹을까 봐 칼국수 집에 데리고 들어갔다. 딸내미는 미동도 없었다. 죽었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얘는 원래 그런 애였다. 로꿈이 보다 더 얌전하고 한 자세를 잡으면 건드리지 않는 한 그 자세를 최소 6시간은 유지했다. 이름을 뭘로할까? 고민하면서 데리고 오는데 표지판에 ‘태리’가 보였다. 그렇게 예쁜 딸내미는 태리가 되었다. 배우 김태리처럼 예쁘게 자라란 염원을 담았다.
크레 인스타계정을 만들고 각종 이벤트에 응모하다 보니 온갖 단톡방과 네이버 밴드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는 모든 크레 집사들이 겪게 되는 과정인 듯하다. 예쁜 크레는 많았으나 세상의 모든 크레가 내 것일 순 없었다. 특히 유명한 밴드에서는 내가 데려올 수 있는 크레가 없었다. 그러다 새로 생긴 어떤 단톡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진행하는 경매 마감 5분 전에 입찰을 했다가 덜컥 당첨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입찰해도 늘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새로 생긴 방이라서 사람들이 경매에 참여를 잘 안 했던 것이다. 2.1그램짜리 베이비마뱀의 엄마가 되는 순간이었다. 안성까지 가서 베이비를 데려왔다. 아기마뱀이들은 가벼워서 정말 잘 뛰었고 자기들이 어디로 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뛰는 팝콘 같았다. 너무너무 귀여웠다. 그 무렵 우리는 천천히를 쫀쫀히 라고 발음하는 놀이에 빠져있었는데 이름을 생각하던 중 아주 쫀득거리는 질감의 베이비에게 쫀쫀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다는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영어 이름은 John Juan으로 정했다. 존-주안.
이렇게 [소동랜드]에는 다섯 마뱀이 함께하게 되었다.